김혁일 시선 12

아침햇살에출렁이다   



저만큼 내 앞을 달리는, 저

출렁이는 단발머리


뉘집 처자면 어떠랴

내가 보면 내 처자인걸


그러나 아침 햇살이 숲에서 뛰쳐나와

먼저 수작을 건다


나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

자꾸 남의 여자 덜미를 들춘다



봄에는봄이왔다가고


그제까지만 해도 설익은

아그배 같은 계집애

올 듯도 하더니

말 듯도 하더니

어느새 완숙한 처녀가 되어

오늘은 봄이 시집을 오네

오늘은 봄이 시집을 가네

산에 들에 늘어뜨린

긴긴 신부 치마꼬리 잡고

나는 뉘 집 철없는 머스마

따라나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나비 3  



나비, 저 고사리손한 줌의 가벼움


피는 꽃 위의

나는 꽃


나비, 저 고사리손한줌의향기


하늘로 지는

꽃잎


깨친자의

가벼운 한숨



새해아침


 

뿔을뭉툭하니자르고나타났다

사슴이


-- 나, 걔하고 헤어졌다

사슴은애써웃어보였다


-- 응, 잘됐다 뭐

    더 아름다운 뿔이 자랄 거야


사슴과나는각자의머리를만지며

환히웃었다




나무  



저 나무는 본디 새였다고

저 나무는 지금도 새라고


바람이 불면 나무는 나는 연습을 한다고

바람이 안 부는 날에도 나무는 비상을 꿈꾼다고


누가 그랬지?


나무의 잎새 하나 하나 모두 날개라고

지는 낙엽 하나 하나 모두 피나는 날개짓이라고


임한테 가고픈

누구는 나무고


나무는

새라고


누가 그랬지?



겨울 아침의 클래식 



이 추운 겨울을

이 추운 육신을

누구의 따뜻한 손이 어루만지는가


이 추운 아침을

이 추운 영혼을

누구의 따뜻한 입김이 호호 불어주시는가


한 송이 작은 꽃이여

한 송이 작은 꽃의 체온이여

허우대 큰 나무 한쪽 옆구리의 따뜻함이여




청산(聽山)



산에는진달래꽃꺾으러가나봐요?

아니요, 산에는 진달래꽃 피는 소리 들으러 가요.


산에는산새소리들으러가나봐요?

아니요, 산에는 산새 가슴이 뛰는 소리 들으러 가요.


산에는산구경가나봐요? 산놀이 가나 봐요?

아니요, 아니요, 산에는 산이 숨 쉬는 소리 들으러 가요.



나무에게 길을 묻다 


 

길은여기서 갈리고

여기서나무들은 작은 숲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그들에게 길을 묻기로 하였다


먼옛날

저들도한때는 구름처럼 떠도는 집시들이었겠지


근데왜 여기다 짐을 풀었을까

왜여기에 정착했을까


모두들 이끗 좇아 바람처럼 쏘다니는 세상이건만

나무는 먹이 하나 기웃거리지 않고

허구한세월을 오로지 한 자리에서…


작은수림은 생각밖으로 깊었다

나무들은모두 기상하여 아침기도를 하는 듯 하였다

기도라기보다는세례를 받는 듯 하였다

세례를받는다기 보다는…

응석을 부리는 듯 하였다


이찬란한 아침

허우대큰 것들이

눈감고

싱겁게어깨를 흔들며


지금은아침 햇살이 나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나의배낭 멘 어깨도 쓰다듬고 있다




겨울밤



한밤, 생나무 부러지는 소리


푸른소나무한쪽옆구리

와르르

소리없이무너져내리는

소리


하얀그리움

버거운적설

눈사태


졸던밤새놀라퍼드덕이고


겨울밤추운

부러진가지의솔향기




겨울


벗은나무

주린나무


발기한나무

팽배한나무


허공만찌르는나무

사정을못하는나무


봄을향한나무

한사코꿋꿋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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