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3

당신의 선물

난 벌거숭이
당신에게 받은 건 햇살 뿐
실컷 당신을 일광욕하고
나는 적도의 추장이 되겠소
그래요
햇살 한 짐으로
독서하고 글쓰고 농사짓고
창문과 현관과 마당과
그리고 속세로 통하는 오솔길 하나를 쓸고…
그래요
당신이 아무 것도 주지 않아
오늘도 난 벌거숭이
새카맣고 반질잔질한
가슴과 어깨와 잔등에 당신의 햇살이 쌓이고 넘치는
나는 눈부신 벌거숭이


내처 사흘 비가 내렸다

내처 사흘 비가 내렸다
하늘도 나목도 산책로 돌층계도 깨끗이 씻겼다
검버섯 같은 최후의 잎새 서넛도 깨끗이 씻겼다
이젠, 봄과 여름과 가을을 거친 모든 희로애락을 입렴해도 되겠지
내처 사흘 비가 내렸다
화장기 짙은 늙은 매춘부같던 세상, 깔끔하고 해맑은 새색시로 변신했다
아, 이제 잘 보인다. 고운 얼굴이며 단아한 눈매며 날씬한 몸매며…
내처 사흘 비가 내렸다
날씨가 돌연 차가워졌다
진짜로 차가워졌다
당신의 따뜻한 체온을 더 실감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
추울수록, 당신은 따뜻하다
멀수록, 당신은 가깝다


8월의 황황한 대지 위에서

때로는 그늘을
때로는 불볕을
자맥질하는

누구의 붓끝이
스치듯
흘린듯

지금 나는
8월의 황황한 대지 위의
민물고기 한 마리

그래, 수영을 잘하려면
알몸이어야지
매끈해야지

있는듯
없는듯
떠들지 말아야지

그래, 그래
바람인듯
그림자인듯


머리칼이 많이 자랐다

머리칼이 많이 자랐다
제법 길다

내 이마를 덮고 내 덜미에 출렁이는
내 애인의 머리칼 같은

머리 위 하늘 밑
아, 쓸어 쥐면 내 빈손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여

내 삶의 의미도 차분히
그렇게 한줌으로 묶을수 있다면


달리다

알몸으로
군살 없이
햇살 가득 안고

넌지시, 소나무 숲 지나는 아침 바람의 리듬으로
숲에맺혔던 빗방울 투닥투닥 햇살에 꽂히는 리듬으로
포르릉새 한 마리 날고 잠깐 꽃가지 혼자 흔들리는 리듬으로

그리고潮汐의 리듬으로
그리고흐르는구름의 리듬으로
그리고먹구름장헤집고 산줄기 타는 햇살의 리듬으로

그리고 다시 아침 저녁으로 불타는 고향마을 붉은 노을의 리듬으로
그리고 다시 강둑에 피고 지는 挑花의 리듬으로
그리고 다시 망망한 우주를 여행하는 푸른 지구의 리듬으로
그리고 다시 천리를 달려온 강물 드디어 평야를 만나 서서히 갈지자로 흐르는 리듬으로


위태롭다

위태롭다
아슬아슬 위태롭다

이슬과 꽃봉오리는 위태롭다
이슬과 꽃봉오리와 그리고 숨 죽인 바람은
더욱 위태롭다

고요한 밀당
팽팽한 밀당

눈부시다
아슬아슬 눈부시다


나팔꽃에게

내 손끝은 바람만큼 살틀하지 못하여
내 손끝은 너를 다치지 못한다
내 입술은 이슬만큼 령롱하지 못하여
내 입술은 너를 다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단 한번 만 피는 꽃이라서
그것도 이슬처럼 스러질 꽃이라서
그래서 그렇게 절박하게 아름다운
나는 너의 아픔을 안다
나는 너의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안다

그러니 너도 알아야 하리
오늘 아침 널 길가에 두고 간 남자는
이미 널 업어갔음을
그리고 이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네가 진 뒤에도
너의 촉촉한 눈길은 오래오래 남아있을 것임을
어느 시인의 메마른 갈피에


엄마를보내고 

이젠
다 다슨
애기 손 만 한
엄마의 호미

이젠
다 다슨
반달이 된
엄마의 놋숟가락

이젠
엄마 천국 가시고
이젠 고향집에
다 다슨 호미 한 자루와
다 다슨 놋숟가락 하나로 남으신

굽고
마르고
왜소해도
말씀 카랑카랑하시던
인품 후덕하시던

엄마
호미날 같은
놋숟가락같은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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