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20

태풍이 지나간 산을 오르며

태풍은 가고
산은 옷깃이 낭자하다
아직은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퍼드리고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태풍이 하룻밤 미치고 간 산은
아직 산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말라 있던 샘물들이 소생하여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은 단 하룻밤의 미침이라고
사랑은 장장 365일의 기다림이라고
사랑은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이라고
누구는 그러건만
그러건만
태풍이 지나간 산을 오르며
나는 혼자 중얼거립니다
사랑이란 그저 홀로의 잉태일뿐이라고


月夜山行

오늘 밤도
달이 오르는 남산을
내가 오른다
달은 산 저쪽에서
나는 산 이쪽에서
오늘 밤도
달이 뜬 남산을
내가 내린다
솔로인 달은
솔로인 나에게 그림자 하나를 따라붙여
이별을 배웅한다

 

하산 

반쪽 달이 밝은
산을
내가 오르고
또 내가 내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느닷없이
니 생각은 왜 나고
노래는 왜 부르고
목은 또 왜 메이노
세월은 갔다가 아니 오고
오리라던 이는 아니 오고
적막강산 달이 떠
산은 푸른데
돌아보면
바람은 키 큰 나무 머리칼 쓰다듬고
힌 구름은 산발을 터치하고
누구는 누구는
혼자 노래하고
혼자 목이 메는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반쪽 달은 밝은데
밤하늘은 푸른데
아리랑은 내가 부르고
아리랑 고개는 내가 넘고
아리랑 고개를 또
내가 넘어오네

 

질주 

저 비단결같이 흐르는
세월의
날씬한 허리
나의 공허한 팔뚝
바람이 분다
나무 한 그루가 머리칼을 날리며
님을 찾아
먼 길을 간다


바람나무

바람이 팔을 벌리면
나무는 먼저 흔들린다

바람은 심심해서 부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심심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워서
그리워서

바람이 팔을 벌리면
나무는 지레 흔들린다

바람이 어깨를 살짝 다쳐도
나무는 온몸을 휘청거린다

키가 큰 상사수(相思樹)는 바람에 약하다
바람이 안 부는 날에도 상사수는 혼자 흔들린다


예배일 

오늘 하루는 숲으로 들어가 매미의 울음을 들었다
오랜 나무와
오랜 바위와
그보다 더 오래고 길 것같은
매미들의 합창
그 여름의
세월의
청춘의
적막하던
흐르다 끊기고
끊기다 또 이어지던
흐느낌
울음
언제부턴가는 그 울음이 득도하여
흘러간 옛노래처럼
지금도 흐르는 흘러간 옛노래처럼
내 가슴을  축였으니
오늘 하루는
오랜만에 숲으로 들어가
매미의 독경을 들었다
해질녁 숲을 나와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한게 없는데
세상은 사뭇 변해 있었다
인파를 거슬러
차들을 거슬러
거슬러  집으로 가는 길
거리의 모든 찌들고 시들고
잘나고 못난 얼굴들이
하나 하나
모두 영아의 얼굴로 보였다

 

새해의 나무에게

누가 도끼로 찍지도 않는데
사람은 왜 쩍하면 상처를 입을까
나무도 우울한 날이 있을까
나무들 중에도 담배 피는 아저씨가 있을까
올해부터 나는
담배 안 피고
술 안 마시고
차와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젊은 혹은 늙은 나무가 되리라
어제의 상처와 흉터는
오늘의 눈
트인 혹은 감은 눈이 되고
눈가의 잔주름마저 은은한 미소로 물결치고
이제는
더는 시름으로 연륜을 새기지 말아야지
오늘부터 나는
노래 부르기 위한 입이 되고
안기 위한 팔뚝이 되고
사랑을 위한 가슴이 되고
나와 너가 있는 곳엔
평화가 푸르고
새들의 고운 지저귐이 부서지고
너로하여
또한 나로하여
누구의 가슴 한 구석과
이 세상의 어느 모퉁이가
조금은 넉넉해지고
이 남쪽의 해변도시에서
올해부터 나는
한 그루 북방의 나무가 되리라



 

어느 조용한 겨울 오후

어느 조용한 겨울 오후
어느 여자의 우윳빛 속살 같은 오후
누구의 조용한 눈망울 같은 오후
멀리 도시의 소음조차 누구의 나지막한 속삭임 같은
오후
비둘기 소리없이 창밖 하늘을 날고
이런 날은 참으로 죽으면 천당 가겠다
입가에 한 가닥 얕은 웃음을 걸고


마흔

언제고 그렇게 얌전히
얌전히 내 곁에 앉아있을 것 같던 고양이는

어느 날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흔이 걸어 나간 창으론
커튼이 부풀고
바람만 미어지게 쓸어들고

참으로 고약하게
고양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즈징화 

꽃이 진다
고즈넉한 산책로 위로 분홍색 즈징화 꽃잎이 지고 있다
때론 폴폴
때론 후둑후둑
온 겨울
지어서는 길 위에 곱게 깔리기도 하고
지어서는 발에 밟히기도 하며
아프지도 않은지
슬프지도 않은지
스러지는 것만큼
사라지는 것만큼
아침마다 새각시같은 꽃잎들은 또다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고개 숙여 얌전히 앉아 있고
유정한지
무정한지
온 겨울
지는 것보다 더 많은 꽃들이
웃으며 떠들며
머리 위에
피어 있다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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